절대 악인은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이 세계관은 꽤나 처참하다.
아마 “듄”에 나오는 아라키스 행성보다도 더 처참한 행성이라 할 수 있다.
그 행성에선 귀중한 스파이스라도 나오지, 여기선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이 지독한 환경에서도 적응을 잘했고, 나름대로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나우시카는 이런 환경을 만든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한다.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고, 파괴해야만 하는 대상인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한다.

실제로 자연은 인간들이 망친 생태계를 정화하는 중이기도 하다.
인간들이 망친 땅과 바다에 퍼진 독기를 자신들 몸으로 다 흡수해 공기 중으로 뿌려 중화시키고, 할일을 다 마친 자기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된다.

자연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인간의 잘못을 모두 짊어지고 살아간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이런 대단한 숲을 지키는 생물도 존재한다.
숲벌레들과 오무라는 존재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숲이 어디에 있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이들이 출동한다.
그것을 대해일이라고 부른다.
모든 오무가 무리를 지어 문제가 일어난 지점으로 모든 걸 파괴하면서 지나간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파괴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죽고, 숲을 만든다.

이 무시무시한 존재도 나우시카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오무도 나우시카를 인정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나우시카한테는 증오와 분노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해, 즉 오염된 숲 입장에선 이렇게 만든 인간이 악이다.
그 숲에 사는 벌레와 오무 입장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 자연은 먼저 움직여서 파괴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냥 존재하면서, 본인이 할 일인 독기를 없애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선 독기를 뿜어내는 부해와 그걸 옮기는 벌레가 악이다.
부해의 포자가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농사를 짓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독기가 워낙 강하기에 완벽하진 않다.
게다가 아이들도 태어나기 전에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

서로 어쩔 수 없는 본인들의 사정으로 증오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상대가 없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다.

증오가 넘치는 세계에서 누가 선이고, 악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끊을 사람나우시카다.

모든 증오의 감정을 던져버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오무에게 다가간 거다.
모두가 설마 설마 했지만, 나우시카는 전설의 그 사람이 됐다.

그 사람,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내려서서,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잇고, 사람들을 푸른 청정의 땅으로 인도할지니.

나우시카는 깨끗한 모래와 물이 있다면, 숲은 독기를 뿜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인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지독한 자연과 조화를 택한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여기에 나온 크샤나도 이 악순환을 끊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방법이 나우시카와는 정반대였을 뿐이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환경에서 자라왔던 크샤나다.
그렇기에 모든 문제는 파괴라는 해결책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최종병기였던 거신병을 이용해 부해와 오무를 파괴하려 했다.

나우시카와 크샤나, 둘 모두 목적은 같았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자의 길이 달랐을 뿐이다.

크샤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적이었던 것은 완전히 파괴시키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그 업보가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나우시카! 너는 너의 길을 가라. 그것 또한 가치 있는 삶이다.
나는 나의 피에 물든 길을 가겠다.

크샤나가 코믹스 판에서 생명을 중시하는 나우시카를 보고 했던 말이다.

이 말과 같이 그 누구의 방식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중시한다고 해서 인간의 멸종을 막을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계를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었던 파괴의 길로 다시 가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와의 차이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일부분

나와 충돌이 있거나 차이가 있다고 틀리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 입장에선 그게 맞고, 그게 선이기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이미 나와는 다르게 살아왔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르지만, 그래도 이해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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